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09년 우루무치 유혈사태 (문단 편집) == 상세 == 7월 5일 약 1천여 명의 [[위구르인]]들이 중국 [[광둥성]] 사오관시에 위치한 공장에서 위구르인 두 명이 살해당한 일[[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02751684|#]][[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381216.html#cb|#]]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격화되면서 [[한족]]들과 충돌했다. 당시 중국의 정보 통제로 인해 상황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7월 5일 저녁에 공안 진압이 시작되자 원래의 평화 시위가 폭력시위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부터 칼 등으로 무장한 위구르족 수천명이 공안과 무력 충돌하고 한족 민간인을 공격하는 인종폭동의 양상을 보였고 주로 한족이 피해자였으나 위구르족 역시 사상자가 있었다. 위구르족 중심의 폭동은 7월 6일 저녁에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그 다음 날에는 역으로 한족이 중심이 된 폭도 수백여 명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해 위구르인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이 운영하던 점포들을 파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이 한족 폭도들로부터 위구르인 거주지를 방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공안에서는 해당 사건의 사망자 197명이 대부분 한족이라고 주장했지만 해외 위구르 민족운동 단체에서는 위구르인 사상자 수가 "실종"으로 계산돼서 축소, 은폐되었다고 주장한다. 2009년 7월 8일 [[세계 위구르 회의]]는 우루무치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로 최대 800명의 위구르족들이 사망했다고 밝혔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2755247?sid=104|#]] 이 유혈사태를 [[중국공산당]] 측은 [[레비야 카디르]] 같은 일부 [[친일]] 인사들이 획책한 분열주의 폭동으로 규정했으나 해외의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 유혈사태가 외부 개입이 유도되지 않은 평화 시위에서 시작되었으며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에 만연한 위구르인에 대한 차별 대우 및 경제 발전 성과 소외라고 지적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주장을 일축했다. 게다가 당시 위구르인들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흔들면서 시위했는데 중국인과 위구르인의 평등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